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2025년은 25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입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 다음 해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레위 25,10)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교회는 1300년에 보니파시오 8세 교황님께서 이 은총의 해를 처음 제정하신 이래 50년마다 이를 기념해 오다가, 15세기부터는 모든 세대가 최소한 한 번 희년의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25년으로 주기를 바꾸었습니다. 우리 서울대교구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희망의 순례자’ 희년에 발맞춰, 올 한 해 사목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강조하여 실천하고자 합니다.
1. 희망하는 교회
이번 희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희망의 순례자’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희년의 목적과 의미는 그저 ‘전대사를 얻는 좋은 기회’에 그치지 않고,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깊여가는 해로 우리를 초대함에 있습니다. 이 뜻깊은 희년에 예수님과 더욱 깊은 만남을 이어가면서,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수없이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의 땀과 피를 바탕으로 이룩한 경제적 발전으로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지만, 풍요로움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여러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급급한 상황입니다. 세대 간의 갈등은 알게 모르게 커져 가고, 저출산 문제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크게 걱정하게 만드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며, 청년 실업 문제, 주택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 현상도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정신 건강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또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분단된 조국의 평화 통일에 대한 관심은 식어가고, 미·중 갈등을 포함하여 남북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긴장과 갈등이 커져가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가르쳐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의 지평을 열어주셨기에, 이 영원한 생명의 지평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의 가치에 맞추어 변화시키도록 불리움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서’(로마 8,24-25 참조)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사람들입니다.
2. 순례하는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번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에서 "모든 희년 행사의 근본 요소는 순례"라고 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순례 여정을 나서는 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도보 순례는 침묵, 노력, 단순한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됩니다."라는 교황님의 말씀대로, 순례는 ‘우리 인생이 바로 순례하는 여정’임을 묵상케 합니다. 도보 순례에서 흘리는 땀방울을 통해 우리네 삶에서 땀 흘리는 수고로움의 고귀한 의미도 되새기게 되고, 순례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향해 시노드 여정을 함께하는 길동무임을 새삼 고맙게 느끼게도 됩니다. 나아가, 도보 순례는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을 묵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순례하는 교회의 지체인 우리에게는 ‘영원의 도시’ 로마 순례가 아니더라도, 서울 도심에도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인 ‘천주교 서울 순례길’이 있음을 주지시키고 싶습니다. 2025 ‘희망의 순례자’ 희년에는 ‘천주교 서울 순례길’의 성지 중 적어도 한 곳 이상을 도보로 순례해 봅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순례 여정 중에 순교자들의 믿음을 묵상해 보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믿음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집시다.
여기에 더하여, 순례하는 교회로서 잊지 말아야 할 더욱 중요한 여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들어가는 영혼의 내적 순례 여정’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일미사를 참례하고 윤리적 삶을 지켜나가는 단계에 그치지 않습니다. 더 깊은 만남, 우리 삶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꾸는 구원자이신 그분의 인격과의 만남의 여정이고, 그분과 사랑의 우정을 깊여가는 여정임을 잊지 맙시다. 이를 기억하며, 내적 순례의 여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 앞에 머물면서 그분과 ‘단둘이 나누는 우정의 대화’ 시간인 성체조배에 맛을 들입시다. 모든 신자가 본당에서 하는 성시간이나 성체조배는 물론,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매월 첫 목요일 저녁에 하는 ‘교구장과 함께하는 성체조배’에도 이 희년 중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직접 참여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조건 없이,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한없는 사랑을, 성체를 통해 만나봅시다.
3. 선포하는 교회
어느 학자가 ‘하느님은 명사(noun)가 아니라 동사(verb)이시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저 위’에 좌정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자비로 우리에게 직접 다가오시는 분이며, 우리를 당신과 인격적 관계로 초대하시는 분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표현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이렇게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사랑을 혼자만 마음속에 가두어 두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외치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복음의 기쁨〉 9항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은 널리 퍼져 나가기 마련입니다. 진리와 선에 대한 모든 참다운 경험은 그 자체로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성향이 있고, 진정한 해방을 맛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들의 요구에 더욱 민감해집니다. 선은 퍼져 나가면서 뿌리내리고 자라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복음의 기쁨을 맛본 그리스도인은 이제 ‘선포하는 기쁨’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선포는 단지 큰 목소리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1) 먼저, 애덕 실천으로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야고 2,18)하신 야고보 사도를 본받아 우리 그리스도인은 애덕 실천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기쁨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다음으로,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모습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는 동행의 모습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모두 우리 사회의 동등한 주인공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동행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좋은 모습입니다.
(3) 끝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또 한 가지 방법으로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있습니다. 2027년 여름에 서울에서 진행될 ‘세계청년대회’는 단지 청년들만의 잔치가 아닙니다. 함께 개최 준비를 해나가는 전 과정을 통해 남녀노소가 다 함께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모두를 위한 잔치요, 신앙의 체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① 첫 번째 방법은 ‘묵주기도 10억 단 바치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 방법은 대회 기간 중 세계 각국에서 온 청년들에게 ‘홈스테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③ ‘세계청년대회’에 주역으로 참가하는 세 번째 방법은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기입니다. ‘세계청년대회’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를 필요로 합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나 봉사자로 참여할 수 있으며, 장기 봉사든 단기 봉사든 방법상으로도 아주 다양하게 열려 있습니다.
‘희망의 순례자’를 주제로 2025년 희년을 맞는 우리 모두 ‘희망하는 교회, 순례하는 교회, 선포하는 교회’를 살아가면서 복음의 기쁨을 더 깊이 체험하고, 선포하는 기쁨을 누리는 한해로 가꾸어 나갑시다.
교회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 땅에 복음의 빛을 전하신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과 복자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4년 대림 시기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대주교 정순택 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