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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당의 독후감 최우수 수상 작품입니다.(내용이 좋아서요.);
--- 준주성범을 읽고 ---
<제목> 아무도 제 날개만을 갖고 날지 못한다.
30여 년 전 영세를 받을 때 가족 중에서 성당을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스로 찾아가 일주일에 두 번 교리를 받으러 다니면서도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져 입에 착 달라붙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은 있었던지라 알지 못하는 기쁨이 가슴속에서 솟아오르고, 혼란스런 젊음에 무언가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아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그때 우연히 성당 앞에서 만난 동네 어른이 당신도 성당을 다니는데 지금은 냉담중이라고 하시는 말씀에도 그저 성당 다닌다는 그 말씀만 들어오고 냉담은 무슨 뜻인지 몰라 "참 잘하셨어요." 라고 말씀드릴 만큼 성당에 나간다는 것은 특별하게 뽑힌 사람들의 그들만의 잔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세례를 받은 후 좀 더 알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천주교는 자기 주도적 학습을 미리 도입한지라 본인이 찾아나가지 않으면 깊은 신심을 갖기 힘들어 이리저리 다니며 도움 될 만한 책을 골라 읽던 중 사전 크기만 한 '준주성범'과 '십자가의 길' 테입을 들으며 결혼 초 힘든 시간에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그때의 그 환희 심과 내 주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그 때의 믿음을 되살리고 싶어 그 책을 찾았으나 책장에 없었다. 이렇게 새롭게 단장되어 손쉽게 본당에서 구해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독일의 사상가이자 종교저술가인 토마스 아 켐피스 수도사제가 500년이 지난 이 시간에도 공감할 수 있는 말씀들을 하셨을까 싶어 놀랍기만 하다.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서 92세에 선종하실 때까지 수도원 후진양성을 위한 지침서로 쓰신 이 글이 오늘에 와서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 같다. 정신생활, 내적생활, 내적위로, 존엄한 성체성사에 대하여 네 권으로 나누어 각 권마다 세부적으로 짧게 여러 장으로 나누어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씀으로 나누어 진 책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갇혀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책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죽은 다음에 누가 너를 기억하며, 누가 너를 위해 기도해주겠는가?
사랑하는 이여, 무엇이든지 할 만한 것이 있으면 지금 하라.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또한 죽은 후 사정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을 때 너 자신을 위하여 불멸하는 재물을 쌓아 놓아라. 네 영혼을 구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지 마라.'
그렇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믿음이 약한 부분이 부활신앙이었다.
그러니 영혼을 구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일에만 열정을 쏟은 게 아닌가.
어떤 사람이 두려워하는 마음과 바라는 마음이 같이 들어 번민하여 어쩔 줄 모르다가 한 번은 심히 근심하며 성당 제대 앞에 꿇고 기도했다.
그러다가 '오! 내가 끝까지 항구하게 될 것인지만 안다면!' 하고 생각했다. 그때 하느님께서 "네가 그것을 안다면 무엇을 하겠느냐?
그 때 하고자 하는 것을 지금 행하라. 그러면 안심하고 잘 지내리라." 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즉시 그는 위로를 받고 기운을 얻어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자기를 맡겼고 모든 걱정스러운 번뇌가 멈췄다. 그는 다시는 자기의 장래에 대해 부질없이 알려 하지 않고 대신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칠 때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지 너를 살피는 데만 주의하라. 네가 힘을 쓰는 그 만큼 발전하리라. 왜 나는 나보다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많은가?
그 관심은 못마땅함과 미움으로 씨를 뿌렸더니 분노의 열매가 맺어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그럼 어떻게 힘을 써야 하나. 그런 의문에 책은 이렇게 답한다. 예수님과 대화하는 법을 아는 것은 가장 위대한 예술이며, 그분을 모시는 법을 아는 것은 가장 위대한 지혜다. 너는 겸손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맞다.
겸손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내 삶을 주도하는 줄로 알고 있을 때이며 평화롭지 않다는 것은 마음에 근심걱정과 미움분노가 가득 차 있을 때였다.
그 때엔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 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나를 통해 하실 일이 무엇인지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타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겸손함을 갖추어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지만 왜 주님 앞에서는 건방을 떠는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이리 저리 들어 알고 있는 고급스런 귀로 미세하게 하시는 말씀이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깨어 있지 못하고 나의 내면 깊숙이 나의 감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었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겸허함이 쌓여가야 하는데 어찌 에고의 덩어리가 뭉쳐 껍질이 더 딱딱해지는지.
심판 날에 심문할 것은 우리가 무엇을 읽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행했는지에 관한 거시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신다. 무엇을 배웠는지를 묻지 않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물을 것이 다 라고. 나는 그랬다.
내가 읽은 좋은 말씀들이 마치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마치 스스로 많이 아는 것 같고 모든 것을 잘 이해하는 것 같은 오만함.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줄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인간의 나약함을 이미 간파하시고 '자신을 이기려고 하는 싸움보다 더 맹렬한 싸움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유혹의 시초는 마음이 흔들리고 하느님께 그다지 큰 신뢰를 두지 않은데 있다.' 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오래된 습관은 끊기 어렵다. 누구나 제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대화하는 법을 아는 것은 가장 위대한 예술이며, 그분을 모시는 법을 아는 것은 가장 위대한 지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너는 겸손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셔야 겸손하고 평화롭지 않은가.
굳은 믿음과 고요함을 유지하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에게 머물러 계실 것이다.
예수님이 나와 머물러 계셔야 고요함을 유지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그러나 이어서 이런 말씀도 있었다. 이 책을 통하여 나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바로 이것이리라.
'네가 천상의 위로를 빨리 받지 못하는 이유는 네가 기도하기를 너무 지체하기 때문이다. 너는 내게 힘써 기도하는 대신에 성급하게 많은 위로를 찾고 피조물한테서 위안을 구하려 한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
아무도 제 날개만을 갖고 날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며, '나에게 안겨서 날아야만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아! 이 한 말씀을 저에게 주시려고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은총을 주셨군요.
당신에게 안겨서 날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을 저에게 허락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의 아드님! 건방진 ( ); 를 불쌍히 여기소서.
2014. 11. 30.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