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주의 (가톨릭신문, 2002년 11월 17일)
19세기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인간생활의 구조에 몇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동 자체의 구조가 변화되었고, 노동 분야에서 과학적,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지면서 노동은 인간 실존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신학자들의 인간 노동에 대한 관심도 커져갔고, 20세기 초에는 노동신학에 대한 연구가 신학분야 안에서 매우 활발히 전개되기도 하였다. 노동신학의 핵심은 이렇다. 곧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세상을 자신의 집으로 만들며, 세상과 조화하면서 존재한다. 인간 노동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노동이 인간 자신을 발전시키고, 하느님의 창조활동을 완성시키는 도구가 된다는 노동의 참된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노동은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본권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과학기술주의가 노동신학의 기초를 가장하여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 창조사업의 가장 중요한 협조자이며, 이 창조사업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모든 것, 즉 지성과 창조력, 온갖 노력을 쏟아 붓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결국 과학기술의 발전은 하느님 창조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허구의 주장이 마치 진리처럼 여겨지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필자는 며칠 전 전통 있는 과학학술단체의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하였었다. 과학자, 의학자, 시민단체 및 정부관계자 등이 함께 참석한 자리였고, 여기서 토론된 내용은 주로 과학-윤리-법의 조화문제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한 발제자가 발표한 내용은 필자에게는 매우 큰 충격이었다. “과학자니까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라고 애써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내용으로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치료복제에 의해 만들어진 줄기세포가 성공한다고 해도 결국은 돈 많은 부자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갈 것이고, 개인적인 맞춤의학 치료방법 역시 수많은 고급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들게 되겠지만 효과적인 치료 방법의 개발을 위해서는 그러한 연구들이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 유전자 조작이든지 아직 성숙되지 않은 채 여성의 몸 속에 들어있는 수 만개의 미성숙난자를 사용하는 일까지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일반의 난치병 환자들에게 돌아갈 혜택이 전혀 없으리라는 충분한 예상을 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윤리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익히 잘 알면서도, 그리고 윤리적 논쟁에 휩싸일 것을 알면서도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전형적인 과학기술주의적 사고방식의 한 예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과학 기술의 연구 분야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제의 생활에 적용되어 일반 시민사회의 윤리관을 아주 빠른 속도로 오염시키게 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 해도 된다” “과학의 도움으로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수단과 방법은 문제되지 않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극단주의를 주장하게 됨으로써 오직 과학 기술만 필요한 것이고, 인간 존재의 존재론적, 윤리적 지평은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될지도 모르겠다.
과학기술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한에서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날 점점 그 위세를 떨쳐가는 생명공학의 발전이 인류의 미래에 희망이 될 것이라고 떠들어대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욱 황폐하게 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주의적 사고는 결국 모든 윤리문제에 있어서 개인의 극단적 자유까지, 심지어는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그릇된 자유까지도 과학의 이름으로 인정하는 극단주의를 초래할 것이고, 나아가 일종의 우상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과학기술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익 레미지오 신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