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사 (가톨릭신문 2002년 12월 15일)
현대 의학 기술의 발달은 인간 생명 뿐 아니라 죽음의 과정까지도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심장박동과 자발적인 호흡의 정지는 즉각적으로 뇌의 죽음을 가져왔으며, 이에 따르는 뇌의 파괴는 호흡과 혈액순환을 중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맥박과 호흡의 정지는 죽음을 판단하는 전통적 기준이 되어 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대의 의학 기술은 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사람에게도 인공 호흡기를 부착하여 산소를 공급하면 심장박동을 1-2주 정도 더 연장할 수 있을 정도로 놀랍게 발달되었다.
심장박동이 멈추고 호흡이 완전히 멎는 상태를 죽음으로 보는 심장사의 기준에서 뇌사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뇌사 상태라도 여러 장기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뇌사는 장기이식과 관련하여 더욱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는가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많은 논쟁 중에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뇌사를 죽음의 기준으로 인정하는가 하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국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다만 몇 년 전에 제정된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장기이식 수술을 위한 장기적출을 이유로 뇌사자에 대한 죽음 판정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뇌사 상태는 당연히 식물인간 상태와 구별된다. 뇌사의 경우,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가 손상되어 심장박동 외의 모든 운동기능이 정지되고 몸은 전혀 움직일 수 없으며, 인공호흡기가 없으면 호흡이 불가능하다. 뇌사 상태에서는 어떠한 수단을 다 동원하더라도 반드시 심장사에 이르게 되는 반면 식물인간 상태는 대뇌만이 손상되어 기억, 사고, 감각 능력 등은 없으나 손발은 조금 움직이며, 호흡이나 호화, 혈압 조절이 스스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회복도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곧 뇌사 상태는 회복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이며, 식물인간 상태는 수개월이나 수년 후에라도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뇌사 상태에 대해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이 죽음의 기준이 된다는 입장을 정리해 왔다. 1985년 교황청 과학 학술원의 세미나에서 내린 죽음의 기준과 그 순간에 대한 정의를 1995년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가 ‘의료인 헌장’을 통해 결정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곧 교황청 과학 학술원은 죽음에 대한 생의학적 기준으로 인간이 몸의 신체적 및 정신적 기능을 조합하고 조화시키는 능력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실되었다면 사망한 것으로, 그리고 정확한 죽음의 순간에 대해서는 심장사와 함께 모든 뇌의 활동이 돌이킬 수 없는 정지 상태가 된 뇌사를 죽음의 판단 기준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정의에 대해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는 신앙과 도덕이 이러한 과학의 발견을 수용하였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다만 신앙과 도덕은 죽음에 대한 명확한 진단을 위하여 다양한 임상적, 도구적 방법들을 가장 정확히 사용해 줄 것을 요청한다.
최근 대한의학회에서는 ‘임종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지침’을 공개하여 뇌사자의 치료 중단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실정법을 거스른다는 면에서 많은 논란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그 치료가 뇌사자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고 단지 죽음의 과정만을 연장시키는 행위라면 그것은 오히려 환자의 고통을 더 연장시키는 의료 집착의 수단이 될 뿐이다. 그렇지만 뇌사자가 아니고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환자의 경우 의학적으로 아주 근소한 회복의 전망이 보일 때에는 반드시 치료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의료인의 당연한 의무이다. 왜냐하면 의료인은 자신이 생명의 주인도, 죽음의 정복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치료 수단을 강구할 때 이른바 환자에 관련시켜 합당한 선택을 해야하고, 환자의 실제조건에 맞추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동익 레미지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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